이런저런 이야기

지적 순례에 오르는 책 읽기

가을글방 2016. 1. 4. 13:26

 

사람은 태어나서 일년 정도 되면 걷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길 위에 설 수 있고 어딘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걷기 시작하면 잡았던 부모의 손을 놓고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방안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방 밖 마당으로 나가게 되고 그리고는 마당을 벗어나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위태위태한 아이들의 걸음 걸이를 보며

"빨리 가려고 하지 마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라."

"집을 못 찾을 만큼 멀리 가지 말아라."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라."

"모르는 사람을 따라 가지 말아라."

하고 끊임 없이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조금만 잘 걷게 되면 자꾸만 멀리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

'저 길을 돌아서면 어디일까? 이 동네를 벗어 나면 그곳은 또 어디일까?'

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유혹을 하고 아이들은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애가 탄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게 되면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가는 것은 매일 집을 떠나는 훈련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 어디론가 무조건 달려가는 대신 <학교>라는 허락된 곳으로 가서 <그 무엇>과 만나게 된다.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을 만난다.

이제까지 <집>에서 가족, 친척, 친지등 한정된 사람들만 만나던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은 매우 낯선 경험이고 조금은 두려운 일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게다가 학교에는 부모처럼 늘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고 또 잔소리를 하는 또 다른 부모인 선생이 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거의가 부모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나 부모와 다른 <개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게 하려고 길 들이려 한다.

그것은 많은 부모들이 누군가에게 길들여 졌으며 그 길들임으로 인하여 비교적 잘(?)살아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점 길들이기는 어려워진다.

여기서 학교와 선생은 부모들에게 필수적인 구원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며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한다.

또 선생이야말로 자신들을 대신해서 아이들을 바르게 잡아주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학교는 늘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안전하게 채워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모들의 기대이고 바램일 뿐이다.

그러나 학교와 선생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부모에게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채워 줄 수 없다.

그 이유는 부모들이 학교에 기대하는 것은 막연하면서 매우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볼 때 두 번째로 가두는 집인  학교 밖에는 얼마나 많은 유혹을 품은 너른 세상이 있는가?

아이들이 끊임없이 한눈을 파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이다.

세상, 즉 집 밖과 학교 밖의 세상은 갖가지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부른다.

그 곳에는 그들이 모르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흥미진진하고 다양한 모습의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 가려면 집과 학교로부터 멀리 떠나야 한다.

매일 길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그 다른 길로 가고 싶은 유혹에서 자유롭기가 매우 힘들다.

부모와 학교는 자꾸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을 제한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려놓은 원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어느 선생님이 운동장에 원 하나를 그려놓고

"내가 올 때 까지 이 원 안에 있어라."

라고 하고 자리를 비운다.

아이들은 과연 원 안에서 선생님이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이 실험은 꼭 해 볼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그려 놓은 원 안에 그대로 있는 아이는 몇이나 될까?

선생님이 돌아와서

 

1. 원 안에 그대로 있었던 사람.

2. 원 밖으로 나간 사람.

3. 원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 온 사람.

4. 원 밖으로 나가서 무엇인가를 한 사람.

으로 조사를 해 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선생에 따라서 각기 높은 점수를 주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아마도 부모들은 1번, 원안에 가만히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원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기다림의 시간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원 밖에는 뛸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매달릴 수 있는 철봉이 있으며 모험을 하며 올라 갈 수 있는 정글짐이 있다.

또 누군가와 함께 차며 놀 수 있는 공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참고 원 안에만 있으라고 한다면 여기에 반발하고 명령을 안 지킨 아이들을 벌 줄 수 있는가?

어른들은 위험하다는 강력한 무기로 아이들을 자꾸 원 안에 가두려고 한다.

어른들의 이러한 가두기에 길 들여진 많은 아이들은 어른이되어 아무런 재미도 없고 발전도 없는 <원> 안에 스스로 들어가 자신을 가두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전히 원 안에 아이들을 가두고

"너희들은 나 처럼 살지 말아라."

라고 말한다.

 

나는 끊임 없이 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나의 원 밖으로 나가기의 시작은 책 읽기였다.

책은 나의 상상을 끝없이 넓은 원 밖으로 유혹했고 그 유혹은 참으로 대단했다.

나는 그 원 밖으로 자유로이 나갈 수 있는 책 읽기에서 사람 만나기를 알았고 사람 좋아 하기를 배웠으며 내가 좋아 할 수 있는 사람을 분류했다.

나는 또 오랜 책 읽기에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찾았다.

대개 사람들은 공부(준비)를 마치고 어른(사회인)이 되면 그가 선택한 길에 들어선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길은 평탄하며 아름다운 길이기보다 험난한 비탈과 높은 산이 도사리고 있거나 끝없는 자갈밭으로 쉬지 못하게 하며 삶을 삐그덕 거리게 하기도 한다.

'이게 아닌데, 이 길이 아닌데, 하며 두리번 거리다 되돌아 가기도 하고 어딘지 모를 샛 길로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즐겁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은 사람들은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이다.

나는 가끔씩 내가 찾던 길 위에 내가 있는가 돌아 본다.

나는 내가 간절히 가고자 했으나 들어서지 못한 어떤 길에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때때로 많이 아쉬워 그 길을 내세에서 찾고 싶다는 소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 길을 평생 걸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책읽기가 동반된 길이다.

내 삶을 온통 채운 책 읽기는 돌이켜 보니 고맙게도 <지적 순례>의 길이었다.

어느 때 부터인가 나는 누군가가 읽어줄 책을 쓰는 어설픈 작가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 권의 책을 쓰는 일 보다 백 권, 천 권의 책 읽기를 한 독자이다.

나는 책 속에서 참으로 고마운 스승을 만나고 그들과 동행하여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길을 걸어온 것일까

그 길이 고맙고 아름다워 나는 어린이들에게 책읽는 길을 가르쳐 주고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한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내가 걷는 길은 곧 여행이고 여행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의 오랜 걷기는 순례의 길이다.

그 길은 한 없는 충만을 주는 <지적 순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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