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책읽자

아픈 아이들의 건강한 사춘기

가을글방 2015. 3. 9. 12:00

 

  모두 깜언  /  김중미 지음  /  창비 펴냄

 

어떤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모두 사실인양 착각할 때가 있다.

몇 해 전부터 청소년 문학이 화두가 되고 청소년 문학작품을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특히 청소년 문학에 관심이 많아 좋은 청소년 문학작품 찾기에 눈을 밝힌지 여러 해이다.

얼마 전까지는 우리 청소년 문학보다는 외국의 그야말로 주옥같은 불후의 명작들에 매료되었었는데

이는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역량 있는 몇몇 출판사에서 청소년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그 마당에 많은 역량있는 작가들이 장을 펼쳤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기에 참으로 많이 발표되는 우리 청소년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매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유는 많은 작가들이 너무 치우친 이야기들에 초점을 맟추어 어둡고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써냈기 때문이다.

문학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해피앤딩으로 끝나서는 별 재미가 없지만 폭력, 그 중에서도 성폭행을 유독 많이 다루고

그 가해자들이 모두 어른들이다보니 자칫 아이들은 크면서 어른들은 신뢰 이전에 경계해야하고 피해야 하는 기피인물로

잘못 확인 인식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매우 컸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삶을 음지에서 움츠리게 만드는 열악한 화경은

시련 그 자체다.

부모를 어려서 잃는다거나

그로 인한 어쩔수 없는 가난한 삶에 내 몰린다거나

장애를 갖고있어  건강한 사람들도 힘든 삶을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거나

누군가의 폭력으로 인한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거나

.............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과 사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김중미의 소설 <모두 깜언>은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을 보듬는 어른들이 있어 그 상처가 아물게 하는 건강한 소설이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거친 세상도 사랑으로 보고 그 속에서 희망의 작은 싹을 찾게 된다.

그러나 가뜩이나 상처 입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온통 나쁜사람들로 꽉 차 있다고 부정적인 의심을 심어준다면

여린 아이들은 그들에게 다가가는 햇빛조차도 거부하고 만다.

 

모두 깜언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중심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중학생 유정이는 언청이로 태어났다.

유정이의 아버지는 유정이가 윗입이 토끼처럼 갈라진 언청이로 태어난 걸 보고

근거도 없이 유정이 엄마의 행실이 얌전치 못해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고 갖은 구박과 폭행으로 유정이 엄마를 내쫒고는 자신도 집을 나갔다.

어린 유정이는 일밖에 모르는 정이 없는 할머니와 부지런하고 심성이 반듯한 작은 아버지 밑에서 컸다.

유정이의 작은 아버지는 생각이 깊은 영농 후계자이지만 농촌으로 시집오려는 아가씨를 만나지 못해

베트남 아가씨와 결혼을 해 다문화 가정을 이루었다.

유정이는 부모를 잃은 대신 참 좋은 작은 아버지와 착한 작은 엄마를 얻어 건강하게 자란다.

같은 마을에 사는 타고 난 일꾼인 광수는 유정이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고 생각한다.

광수도 엄마가 없다.

광수의 엄마는 광수가 어릴 때 가출을 해서 광수는 엄마의 얼굴도 모른다.

그 조용하고 평범한 마을에 그야말로 도시의 아이, 새로부임하는 성당 신부님의 아들 우주가 전학을 온다.

유정이는 마치 연예인처럼 수려한 외모에 예의 바르고 광수와는 비교할 수 없게 세련된 우주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런 각기 다르나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아이들은 이런 저런 일들을 쉴새 없이 만들며 커 나가고

그 아이들의 삶은 바로 마을의 활력소다.

 

김중미의 문학은 건강하다.

그것은 오래 변두리 지역에서 공부방을 하며 변두리 지역민으로 살아온 건강한 삶에 바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깜언>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닫치는 한 두 가지의 문제점들과 싸우며 산다.

그러나 그들은 힘들어도 누구를 탓하거나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대신 그것을 삶 자체로 받아들인다.

오랜 세월 태어난 고장에서 이웃하며 살아온 이들은 누가 이름지어주지 않아도 그냥 이웃, 다시 말해 큰 의미의 가족이다.

더구나 이 책을 읽으며 매우 편인한 휴식같은 느낌은 작가의 수려한 문장이다.

그냥 누가 읽어도 부담이 없는 유려한 흐름은 작가의 역량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연작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을 작가는

 <괭이 부리말>이후 13년만에 우리에게, 그러므로 더욱 반갑고 고맙게 보여 주었다.

이 책을 쓴 작가와 이 책에 나오는 여러분,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많은 독자들 힘차게

 

모두 깜언! (모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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